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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山 정산 박연차 평전 評傳 "니, 밥묵고 가라" 中, 이현진 비서의 글 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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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17회 작성일 21-07-0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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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간 모셨던 박연차 회장님의 이모저모"

正山 박연차 評傳 中, 이현진 비서 글


복잡하고 어려운 말 싫어하고 비상한 기억력으로 업무 파악

만남



그분을처음 만난 건 한국에 IMF의 한파가 몰아닥쳤던 1997년 11월이었다. 몇마디 물으시고는 흔쾌히 대표이사 회장 비서채용 최종 면접에서 ㅇ케이하셨고, 그렇게 그분과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정식 입사 첫날인 1997년 12월 1일은 태광실업이 제 34회 무역의 날 급탑산업훈장을 수훈한 기념으로 김혁규 경상남도지사께서 김해 태광실업 본사를 방문하여 기념촬영을 하였는데, 입사 첫날인 나에게도 같이 기념촬영을 하자고 제안하셨고 그 사진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보관되어있다.



선임 비서에게 2주간의 교육을 받고 시작한 업무였지만 그다지 어렵거나 힘들다고 느껴지진 않았던 것은 대학졸업도 하지 않은 채 갓 입사한 신입사원이 느끼는 책임감과 무한한 도전의식도 한 몫 했을 것이고, 또한 그분이 처음부터 스물 세 살 밖에 안된 직장 새내기에게 어느정도의 아량을 베풀어 주셨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입사 초기 한눈에 파악한 것은 그분의 성격은 좋고 싫음이 매우 분명하였고, 일하는데 있어서도 선이 굵고 분명해서 임원들이 업무보고를 할 때 그분이 제일 많이 하시는 말씀은 "그래서 된다는 말이가? 안된다는 말이가? 란 말이었는데, 그 말투가 아직도 귀에 정확히 생생하게 꽂혀 맴돈다. 17년간 그분의 비서로 일하는 동안에는 성격이 매우 급하시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지금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많은 사람들 (수만명의 임직원)과 계열사를 거느리며 하루종일 쉼없이 결재하고 미팅하고 통화하고 보고받고 저녁 접대까지 이어지는 스케줄 속에서 가장 가까운 비서나 스텝들이 그것을 제대로 연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상한 기억력



그분의 기억력은 참 신기할 정도였다.

내가 23세에 53세이셨던 그분의 기억력은 참 대단하셨다. 당시에 일하는 본사의 수백명의 사무실 관리자 뿐 안리ㅏ 현장 직원분들 식당 조리원, 경비아쩌시나 회사 임직원의 자녀들 이름까지 기억하셨고 자택의 난실에 있는 난의 뿌리 갯수까지 기억하셨고, 탕비실 냉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우황청심환의 개수라던가, 특별히 좋아하셨던 음식인 굴비를 선물로 받은 날이면 식당에 보관하였다가 몇 마리씩 점심때 구워서 임원들과 나눠드시기도 했는데 몇 달전에 받은 것일지라도 그 굴비를 몇마리 먹었고 몇마리 남았는지까지 기억하실 정도였다.



그때부터 내가 기억할 수 없는 부분은 노트에 적을 수 밖에는 없었고 나에게 있어 업무노트는 학창시절에 써왔던 노트를 넘어설 정도로 수량이 많아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재무적인 부분은 말할 것도 없이 정확하셔서 자금관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본사뿐만 아니라 청도공장, 베트남공장 할 것 없이 매일 전사 자금업무보고를 받아보고 업무보고서에 오타라도 있는 날이면 오히려 임원들에게 지적을 할 정도로 정확하셨다. 매일 올라오는 보고서만해도 출근시간인 아침 8시에는 신문스크랩, 전일 각 공장병 생산일지, 자금업무보고, 계열사별 대표이사 결재문서가 올라왔고, 오후 3시 30분에는 주식상황보고, 오후 4시에는 명일 각 공장별 생산일지, 매주 1회마다 부동산 업무보고, 정산컨트리클럽, 베트남 대사관 업무 김해상공회의소 업무보고, 정산장학재단, 신발피혁연구소, 한국신발산업협회, 대한레슬링협회 등 수없이 많은 보고서를 검토하면서도 오타나 틀린 내용이 있으면 가차없이 지적을 하실 정도로 기억력과 집중력은 대단하셨다.



회장님께서 지시하셨거나 계획했던 일이 잘 진행되지 않거나 보고가 자꾸 늦어지거나, 조금이라도 허위보고가 있거나 하게 되면 회장님은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내고는 불호령을 내리시는데 이런 회장님의 카리스마는 직원들에게는 일을 미루지 않고 추진력있고 빠르게 해내는 원동력이 될 뿐 아니라, 신속하면서도 실수없이 꼼꼼하게 일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고 오히려 직원들간에 끈ㄱ느한 동지애가 생기게 되는 원동력이 된 것이었다.



나는 그분 곁에 있으면서 일복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회장님께서는 하루가 멀다 않고 늘 많은 프로젝트를 숙제로 내주셔서 임직원 들은 쉴새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던 만큼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에는 보람도 컸고, 직원들끼리의 결속력과 동지애가 더욱 강해진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소탈함과 인정스러울


그분은 직원들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하셨는데 특히 나와 친했ㄷ너 임신한 여직원에게 "순옥아, 아(애기) 언제 나오노?"라고 항상 지나가면서 안부를 물어주셨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사해서 마흔을 바라보던 결혼 안한 여직원에게는 늘 "진경아, 언제 시집가노?"하시며 안부를 챙기셨다.



본사 남자직원들에게는 아들 딸 돌잔치에 돌반지를 사서 주라고 나에게 개인돈을 꺼내주셨고, 심지어 총무팀 남자직원 돌잔치에 직접 참가하신 적도 있었다. "미스리나 이대리, 이차장"이 아닌 "현진아"라고 이름을 불러주시던 분, 임원들에게도 격식있는 자리거나 미팅자리가 아닌 단독 보고나 면담때는 예외없이 이름을 늘 불러주시는 분, 박사장이 아닌 "000" - 이렇게 불러주는 이름이 얼마나 듣기가 좋은지 지금도 그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회장님과 함께 그분을 가까이서 모셨던 수많은 직원들과 법인장님의 얼굴이 떠오르고, 회장님께서 법인장들과 임직원의 이름을 부르시는 모곳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게 들려온다.



당시 회사의 분위기가 매우 좋아서 특별히 직원들 사이에서도 사내 커플이 유달리 많았는데 직원들이 사내결혼을 하면, 회사의 축의금과 별도로 회장님께서 가전제품을 사주실 정도로 직원들에 대한 배려를 하셨는데 그 횟수가 너무 많아져 나중에는 그 관례를 회사규정으로 제정할 정도였다.



해마다 추석 명절이면 친한 고향친구분의 어머니까지 신경을 써주셨는데, 자녀분이 상경하고 홀로 남으신 고향 친구분의 어머니께 해마다 명절이면 쓸쓸히 혼자계시는 것이 안쓰러우시다며 개인돈으로 명절에 쓰실 돈을 챙겨주신 분이다.



외부에서 사무실에 선물이 들어오면 한번도 집으로 가져가지 않으시고 기록으로 회장님께 보고는 하게 하되, 직원들에게 나누어주셨다. 명절 때마다 비서실에서는 들어오는 선물을 직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는 업무도 하나의 일이 될 정도였다.



또 회장님을 소탈하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그분은 회살르 방문하는 모든 분들께 항상 식사를 대접하셨던 분이다. 항상 만나는 모든 분들께 식당에서 밥을 대접하셨고, 심지어 저녁까지 챙기시는 분이었다. 그런 인정스러움이 결국 상대의 마음을 사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밥을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2003년 6월 내가 결혼사기 전까지는 그분은 참 내게도 하루일과를 마치고 나면 "밥 먹고 가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고, 퇴근길에 만난 직원들이게도 "밥 먹고 가라"하면서 직원들에게 종종 비싼 밥을 사주셨던 기억이 난다.



이런 회장님 경영철학으로 인해 태광은 오래전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회사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챙겨주는 회사로 김해에서는 유명해졌고 (점심에는 한식 뿐 아니라 매일 양식 또는 중식으로 특식이 추가로 제공됨) 그 밥이 얼마나 맛있었던지 미국 본사에서 미팅참석차 왔던 나이키 직원도 맛있다고 하였고, 태광실업의 계열사 직원들까지 태광에서 밥 먹어보고 싶다고 할 정도로 소문이 자자했으며 그 내용이 알려져 지역신문사에서 식당에 취재를 나와 신문에 실리 정도였다.



회장님께서 식당에 들이는 노력과 정성은 정말 대단해서, 매일 본사영양사에게 김치맛이며 반찬들의 평가를 회장님께서 직접 하셨고 어떤 날은 본인이 영양사(영양사도 1996년부터 현재까지 근무중)에게 직접 반찬 레시피를 가츠져 주기도 할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기억에 남는일은 2004년, 2007년 두 번, 나의 출산시기였는데 2000년대 당시만 해도 여직원이 회사에서 승진을 하거나 임신하고 회사를 다니는 경우가 흔치 않은 시대여서, 당연히 총무팀에서는 회장님 비서가 결혼을 하고 임신까지 하게 되니 처음에는 은근히 회장님 눈치를 보며 어떻게 해야할지 곤혹스러워 하는 것이 내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정말 기우였다.



내가 점점 배가 불러오자 당시의 비서유니폼(은행직원과 비슷한 유니폼)을 임부복으로 따로 맞추게 해주셨고, 만삭이 되었ㅃ을 때 배가 나온채 허리숙여 회장님 응접실 테이블을 닦는 것을 보시더니 안쓰러우셨는지 웃으면서 본인이 직접 하시겠다고 하셔서 막달 한달으니 거의 회장님께서 나의 업무를 도와주셨던 것이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평생 남아있다.



나와 한달 차이로 결혼한 회장님 둘째딸과 같은 시기에 임신을 했던 나에게 회장님은 잉어를 2박스 고아주시며 한 박스는 둘째딸에게 한 박스는 나에게 주실 정도로 직원을 가족처럼 아껴주신 분이었다. 나는 두번의 임신 기간동안 3개월의 육아휴직을 거의 전부 사용했고 3개월동안 내 업무는 베트남 통역을 하던 여직원이 대신 봐주고 있었다. (베트남 명예총영사로 활동을 많이 하실 시기여서 베트남 통역업무를 하는 직원이 있었음)



지금도

82년생 김지영

이라는 책이 몇 년간 베스트 셀러가 될 정도로, 여성들의 경력단절 문제가 크게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지만, 회장님께서는 한번 일을 맡기고 믿음을 주신 이후로는 여자가 되었던 남자가 되었던 적대적으로 그 사람에게 힘을 많이 실어쥔 분이다. 나는 97년 주임으로 입사하여, 남자직원들과 비교하였을 때도 결코 뒤처지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대리-과장-차장으로 승진을 하였고 태광은 지금도 여자 팀장, 부장, 임원이 각 부서와 현장 등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회사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인물로 자리잡고 있다. 태광은 나이키의 경영철학을 이어받아 10여년전부터 여성 임원을 키우는 일에 각별히 힘쓰고 있다.







믿음



그분은 이렇게 한번 믿음을 준 직원이나 사람에게 굉장히 크게 신뢰하고 믿는 것이, 다른사람들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한번 그분께서 믿음을 가지시면 정말 많은 것을 본인이 다 해주려고 하셨다.



태광실업 학자금 제도는 지금도 왠만한 대기업 못지않다. 직원들(현장직 근로자포함)의 자녀 대학교 학자금까지 지원을 해주시니 아이가 셋 있는 임원들이 미국 유학까지 다 보낼 정도로 태광의 학자금 제도는 그분의 직원들에 대한 믿음의 결과물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나에게도 역시 참 많은 사랑과 믿음을 주셨다. 어릴적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하였던 것이 한이 되었던 것인지, 2000년경 그분께 어렵게 말씀을 꺼낸 적이 있는데 나는 당시 전공이었던 정치외교학 대학원을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주 2회는 업무시간 이후에 수업이 가능하나 주 1회 정도 업무시간 중에 수업이 있어 회장님께 매우 어렵게 말씀을 꺼내 양해를 구하려 하였는데 오히려 그런 내게

내가 니 대학원 학비 내줄게

하셔서 본인이 일하시는 중간에도 2년동안은 주 1회를 오후 4시경 나를 먼저 퇴근하게 해주셨고, 학비까지 지원해 주실 정도로 그분의 직원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정말 대단하셨다.



그분은 이렇게 참 소탈하고 솔직하고 좋고 싫음이 분명하셔서, 한번 믿은 직원이나 사람에게는 격식없이 밥을 사고 술을 사고 자녀들 용돈까지 쥐어줄 정도로 호탕한 성격이셨다. 특히나 어려움에 처하여 도움을 호소하고 힘들다고 부탁을 하는 사람에게 거절하는 모습을 잘 본적이 없었다. 임직원들의 경조사나 대소사 뿐만 아니라 동네사람들, 고향사람들, 거래처, 지인들.. 너나 할 것 없이 그분을 가까이 대해본 사람이라면 그분이 얼마나 인정이 많고 잘 베풀고 호기로운 성격인지 인정할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회장님께 누군가로부터 "감사편지"가 올 정도로 베푸는 것을 좋아하셨던 분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호의를 많은 사람들이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분의사랑과 믿음을 진정으로 느껴본 사람이라면, 2008년 7월 세무조사를 두고 정치적 세무조사, 표적 세무조사라고 표현하는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진정한 평가는 이제부터 시작일 지도 모른다

역사에 기록된 모든 인물이 그렇듯이, 현대사만 돌이켜 보아도 박정희 대통령이나 전두환 대통령의 과오를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그 시대를 바라노는 관점에 따라 다르며 현 시대의 흐름이나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분명 그분에 대한 평가를 2008년 시작된 국세청의 물타기 수사 그리고 언론에 비추어진 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것에는 올가 있다.



경영학 수업이나 교과서에서 배운대로라면 신발산업은 1960년대 이후로는 점점 쇠퇴했어야 할 사양산업이었다. 그러나 IMF한파가 몰아닥쳤던 1997년도도 그랬고, IMF보다 더 경제가 어렵다는 2018년까지도 태광실업이 이렇게 꽁꽁 얼어붙은 경제한파를 비껴갈 수 있었던 경쟁력은 과연 무엇일까?



1994년, 그 누구보다 먼저 빠르게 베트남에 진출하여 지금은 베트남 직원들을 가족과 같이 대할 정도로 정확한 선견지명과 빠른 판단력과 실행력을 가지신 덕분이었을 테고 그분은 직원들에게 상과 벌을 확실히 주셨던 남다른 카리스마를 가지셨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석/박사학위를 손에 쥐고도 취직할 곳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며 이 나라를 떠나겠다는 청년 장년들이 늘어난다는 작금의 현실이 매우 안타깡누 일이 아닐 수 없다. 금수저냐 은수저냐를 탓할 시간에 우리가 그분에게 진정 배워야 할 점은 아무것도 물려받은 것, 배운 것 없이 시작하였지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 남들보다 앞장서서 힘든 일 마다하지 않았고 사람의 마을을 진정으로 얻고자 노력하였기에 지금의 태광실업과 그 계열사와 10만여 명의 직원들 뿐만 아니라 계열사의 가족들까지도 함께 밥먹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분의 통찰력, 판단력, 사람을 대하는 능력, 베트남 등에서 세운 업적 등은 매우 범상치 않은 것이었고, 특히나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은 그분을 알고지내는 많은 지인들 뿐만 아니라 베트남 정부 고위관료들까지도 그를 인정하는 부분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1997년 12월 1일 입사하여, 주말근무며 명절근무도 마다않았고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와중에 결혼도 하였고 아이를 둘 낳았고 남들처럼 직장맘으로 몸이 부서져라 뛰어다니며 아이들 때문에 눈물지으며 힘든 적도 많았으며. 더구나 2008년 세무조사 이후로는 죽고싶은 만큼 견디기 힘든 시간들도 많았지만.. 나의 처음이자 전부였던 직장생활이 5년이 지난 지금도 이상하게도 너무 많이 그리운 것은 내열정과 에너지를 아낌없이 모두 쏟아 부었기 때문인 듯 하다.



그리고 17년이 넘는 오랜시간동안 그분을 한결같이 상사로 모시는 것을 천직으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분이 내게 준 그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남녀간의 사랑이 아닌 직장상사로서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사랑과 믿음을 그분은 내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셨다.



그분은 회사를 위해 매우 큰 공을 세웠던 임원들이나 법인장님들에게 퇴사이후 몇년동안 사무실을 내주시기도 하였고, 비서와 기사까지 지원을 해주셨으며 "고문"이라는 제도를 통해 임원들이 갑자기 퇴사한 이후에 몇년간은 먹고살 수 있는 지원을 해주시는 아주 통 큰 분이었다.



운명



이렇듯 회사의 임직원들 뿐 아니라, 그분을 가까이 뵈었던 많은 지인들이 그분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고 평생 그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다만 국세청의 세무조사로 시작하여 검찰조사와 여러사람들의 구속사태로까지 이어진 그 사건 이후로 그분에게 도움을 받았던 많은 기업들과 일반인들까지 그분에게 받은 은혜를 갚지도 못한 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고 숨 죽이고 있을 것이다.



2008년 7월 세무조사 이후 많은것들이 회장님과 나 사이를 이간질시켰고, 모질고 호되게 운명을 바꾸어 놓기도 하였다. 이것도 모두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진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법이다. 감추고 싶은 것은 잠깐은 감출 수 있지만 영원히 감출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진실은 진실된 것을 바라보고 싶은 사람에게만 보일 것이다.



2008년 국세청의 세무조사로 인하여 그분이 베풀었던 수많은 호의와 사랑과 믿음은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버렸다. 정말 순수하게 사람을 믿고 베풀었던 호의가 정말 돌이킬 수 없이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그분은 2008년 이후 혹독한 시련과 어려움을 견디셔야만 했다. 분명 그분을 아는 분이라면 그분이 얼마나 순수했는지 솔직했는지 악의 없이 격의 없이 소탈하게 사랑과 믿음을 준 것인지 잘 알것이다.



내게도 참으로 모질었던 2008년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직장생활 10년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꼼꼼하게 일하였고, 누구보다 인정받고 있었던 나는 그 이후로 세무조사, 검찰조사, 재판 등으로 힘든 시간과 싸우며 보낼 수 밖에 없었고, 나의 수많은 업무노트중에 하나였던 다이어리까지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결국은 나 스스로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어 돌아오게 된 것이다. 나에게는 비서업무 10년동안 없어서는 안되었을 중요한 업무노트가 (어떠한 사정에 의해서든)결국은 그분과 그리고 당사자분께는 크나큰 상처가 되었기에 그분들께는 참으로 송구한 마음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나의 진심과 진실을 아시기에, 이제는 회장님의 비서가 아닌 출장업무를 담당하는 거래처로서 지속적으로 지원을 하여주시고 계시며 나는 이런 그분께 늘 감사한 마음으로 매일 그분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



요즘도 가꿈 꿈에 그분과 가족분들이 나타난다. 45년의 세월동안 그분을 그림자처럼 내조하신 사모님(신정화사모님)께도 특별히 감사드리는 것은, 20여년째 나를 마치 딸처럼 인정스럽게 대해주시기 때문이다. 그분을 소리없이 뒷바라지하며 세무조사 뿐 아니라 수많은 어려움도 늘 긍정적인 에너지로 이겨내시고, 소녀같은 감성으로 나를 대해주시며.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도 늘 한결같이 대해주시는 사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다.



한번 비서는 여원한 비서.. 그분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서슴치 않을것이며 오래도록 믿고 따르고 그리워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마치 인생에 있어 단 하나의 큰 별처럼, 소중하고 강렬한 의미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장님의 발자취를 30년동안 가까이서 밟아오며 그분의 업적과 선행을 오래도록 글로 남겨주신 월간부산 백승진 사장님께 감사드리고 또한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데 대하여도 감사를 드린다. 부디 백사장님의 원고가 세상에 알려져 박연차 회장님의 업적과 선행과 그분의 인간적인 모습이 재조명되고 재평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1년 전 회장님을 처음 모셨던 그날을 기억하며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만나,

스물셋에서 서른아홉까지 열정을 바쳐 일했던 나를,

어려운 시간을 뒤로하고 묵묵히 응원 해주시는 구분께,

앞으로도 영원히 내 인생에서 큰 지원군이 되어주실 그분께,

존경하고 그리운 그분께, 이 글을 바칩니다



-회장님의 영원한 비서 이현진 드림-






옮긴이. 사라토가 도용복회장님 비서 최경식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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